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요동정벌 (문단 편집) == 파사부 정벌 == >令宰樞至吏胥 人備弓一 矢五十 劒一 戈一 閱于崇文館。 >재추(宰樞)[* 재상]로부터 이서(吏胥)[* 아전]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원들에게 분부하여 활 1개, 화살 50개, 검(劒) 한 자루, 과(戈)[* 폴암] 한 자루를 갖추게 한 다음 숭문관(崇文館)[* 고려 시대 왕의 직속기관이다. 초기에는 숭문관이라 불렸지만 성종 14년에 홍문관으로 이름이 바뀌어 문신 중에 학식이 뛰어난 자를 뽑아 학사로 임명했다. 충렬왕 24년에 숭문관으로 이름을 다시 바꾸었다.]에서 사열했다. > >{{{#!wiki style="text-align:right" 《고려사》 권38 [[공민왕]] 원년(1352년) 윤 3월}}} 공민왕은 1351년, 즉위 직후 시행한 일들 중 하나가 바로 군사 검열이었다. 친원 세력이 버티고 있던 요동을 정리하겠다는 의도이기도 했다.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조상이자 전대의 왕인 고려 [[숙종(고려)|숙종]]과 마찬가지로 내부적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. {{{#!wiki style="margin:24px 0 0 16px;float:right;width:40%;max-width:500px;font-size:.9em;" [[파일:attachment/yodongattack2.png|width=100%]][br] 공민왕 재위 초 고려의 영토와 주변 상황[* 여기 지도에서는 압록강을 살짝 넘어가 있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압록강이 경계선이었다.] }}} 요동 정벌에 대해 재위 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압록강 건너 요동으로 가는 길목인 파사부 공략이었다. 1357년, 공민왕 6년 6월에 [[인당]]에게 병력을 주어 압록강을 건너도록 했다. '''고구려 부흥 세력의 [[고연무]]와 신라의 [[설오유]]의 연합작전 이후 최초로 한반도 안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 원정을 한 것이다.''' >癸丑。印璫引兵渡鴨綠江 攻婆娑府等三站 破之。 >계축일. [[인당]](印璫)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(婆娑府) 등 세 참(站)을 공격해 격파했다. 원은 요동의 주요 도로마다 역참을 설치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파사부였다. 파사부는 지금의 [[랴오닝성]] [[단둥시]] 일대로 [[압록강]]의 하구로서 한반도와 요동을 잇는 통로이다. [[고구려]] [[미천왕]] 때 점령한 서안평이 바로 이곳이었으며 그 후에 고구려에서는 구련성(九蓮成)이라 불린 것으로 추정된다. [[러일전쟁]] 당시에도 만주 진출을 노리던 [[일본|양]][[러시아|국]]이 충돌한 적이 있을 정도로 만주 진출시 가장 먼저 점령해야 될 요충지였다. 그 후 명나라가 건국한 직후인 1368년, [[공민왕]]은 사신을 보내며 명나라에 저자세를 취한다. 하지만 이는 [[공민왕]]의 본심이 아니었다. 요동은 명나라와 원나라 모두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다. 명나라는 내부 친원 세력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바빴고, 원나라는 더 이상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.[*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난 후 생긴 북원은 1388년 멸망한다. 명나라 건국 후인 1368년에 곧장 멸망한 건 아니다.] [[최영]], [[이성계]], [[이인임]] 등 고려의 정치적 주역들은 이러한 상황을 놓치면 안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. 1370년 1월 겨울. 고려는 파사부에 이어 요동성으로 가는 주요 요충지인 고구려의 첫 수도, [[졸본성]]이 있었던 오녀산성을 공략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